석야, 신 웅 순(시조시인․평론가․서예가, 중부대교수)
김정희의 침계, 간송미술관 소장
추사의 가로 현판 글씨 중 명품으로 꼽히는 글씨이다. 침계 윤정현의 부탁을 받고 쓴 글씨인데 완성까지는 30년이나 걸렸다. 예술적인 완성을 위해 추사가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는지 잘 보여주는 글씨이다.
윤정현은 삼학사인 윤집의 후손으로 침계는 그의 호이다. 51세의 나이로 출사해 성균 대사성, 홍문관제학,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병조판서에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며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다.
추사는 1851년 7월 22일 북청으로 유배의 명을 받았고. 윤정현은 그 해 9월 16일 함경감사로 명을 받았다. 불과 두 사람은 두 달 상간이다.
침계가 판서에 오르자 추사는 축하 문구 ‘도덕 신선(道德神僊)’ 을 선물해준 일이 있었다. ‘공송침계상서(恭頌梣溪尙書) ’삼가 침계 상서(판서)를 칭송하다‘라는 제까지 써주었다. 도덕신선(道德神僊)은 ’도와 덕을 갖춘 신선‘이라는 뜻이다. 추사의 후배이자 제자이지만 침계 글씨를 보면 그와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 그였기에 추사에게 윤정현의 감사 부임은 뜻밖의 소식이었고 반가운 일이었다.
추사의 ‘도덕신선’, 개인 소장
침계의 제발은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梣溪' 以此二字轉承疋囑, 欲以隸寫, 而漢碑無第一字, 不敢妄作, 在心不忘者, 今已三十年矣, 近頗 多讀北朝金石, 皆以楷隸合體書之, 隋唐來陳思王, 孟法師諸碑, 又其尤者, 仍仿其意, 寫就, 今可以報 命, 而快酬夙志也. 阮堂幷書.
침계(梣溪) 이 두 글자를 부탁받고 예서로 쓰고자 했으나, 한비에 첫째 글자가 없어서 감히 함 부로 쓰지 못한 채 마음 속에 두고 잊지 못한 것이 어느새 30년이 지났다. 요즈음 자못 북조 금석 문을 꽤 많이 읽었는데, 모두 해서와 예서의 합체로 되어 있다. 수당 이래의 진사왕이나 맹법사비 와 같은 비석들은 더욱 뛰어났다. 그래서 그 필의를 모방하여 썼으니, 이제야 부탁을 들어 쾌히 오래 묵혔던 뜻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 완당 김정희 짓고 쓰다.
유홍준은 이 작품을 ‘한나라 때 예서체의 준경하면서서도 멋스러운 자태, 삐침과 파임의 미묘한 울림, 금석문이 지닌 고졸하면서도 정제된 맛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명작이다.“ 라고 말했다.
부탁 받고 30년 후라니. 저간의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추사의 예술에 대한 고뇌가 어떠했는지 이 글씨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들 사이의 돈독한 신뢰가 ‘침계’와 같은 불후의 명작을 만들어낸 것이다.